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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몽키하우스의 진실: 기지촌 여성들의 숨겨진 아픔과 강제 수용의 역사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몽키하우스에 관한 충격적인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처음엔 그저 이상한 이름의 시설인 줄 알았는데, 영상을 보면서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도 외면했던 한국 여성들의 아픔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영상을 통해 알게 된 '몽키하우스'의 실체와 그곳에 갇혔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몽키하우스란 무엇인가? - 탈출할 수 없는 여성 수용소

 

 


몽키하우스는 공식적으로는 '성병 관리소'라 불렸던 시설이에요.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감옥과 다름없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창살 안에 갇혀 있었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죠. 심지어 2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허리를 다치는 사고도 빈번했다고 해요.

더 충격적인 건 이 여성들을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인 사람들이 경찰과 공무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범죄자를 잡듯이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했고, 심지어 연행 과정에서 버스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여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 몽키하우스는 성병 관리소라는 명목으로 운영된 여성 강제 수용 시설이었다.


수용된 여성들은 창살 안에 갇혀 탈출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경찰과 공무원들이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강제 연행했다.
연행 과정에서 버스에서 뛰어내려 사망 사고도 발생했다.

 

성병 관리라는 명목 아래 숨겨진 인권 유린

 

 

몽키하우스의 주된 목적은 성병 관리였습니다. 여성들은 매주 두 번씩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고, 합격하면 보건소에서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이 '검사 패스' 도장이 없으면 길도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어요.

더 가혹했던 건 '컨택'이라는 제도였습니다. 성병에 걸린 미군이 특정 여성을 지목하면, 실제로 성병이 있든 없든 그 여성은 무조건 몽키하우스에 강제 수용되었어요. 수용된 후에는 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치료가 강행되었습니다.

• 여성들은 매주 두 번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에 합격한 증표인 도장이 없으면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컨택'이라는 제도로 미군이 지목한 여성은 무조건 수용되었다.
실제 성병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수용자에게 치료가 강행되었다.

 

 


페니실린 주사와 사망 사고의 충격적 진실

 

 

 

몽키하우스에서는 주로 페니실린 주사를 통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주사는 수용된 여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단순히 맞는 순간의 통증 때문만이 아니라, 주사 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발견된 충격적인 문서에 따르면, 1978년 당시 보건사회부는 법무부에 페니실린 쇼크사가 발생해도 의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했고, 법무부는 이를 수락했다고 해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의료 사고를 두고 면책을 요구하고 약속한 국가 기관들... 당시 기지촌 여성들의 생명은 그들에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을까요?

• 몽키하우스에서는 페니실린 주사를 통한 치료가 강행되었다.


페니실린 주사로 인한 쇼크로 사망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1978년 보건사회부는 페니실린 쇼크사에 대한 의사 면책을 법무부에 요청했다.
법무부는 이를 수락하고 검찰에 수사 신중을 지시했다.

한미 친선의 이면에 숨겨진 '깨끗한 성' 제공 정책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비인간적인 시설을 운영했을까요? 충격적이게도 한미 친선 협의회의 주된 의제가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관리 대책이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깨끗한' 여성을 원했고, 한국 정부는 이에 부응하기 위해 보건소의 50% 이상을 기지촌에 집중적으로 설치했어요.

이건 단순한 보건 정책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당시 기지촌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는 국가 외화 획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거든요. 성병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외출을 금지시켜 지역 경제에 타격을 줬기 때문에, 정부는 성병 단속과 관리에 엄청난 공을 들였던 겁니다.

• 한미 친선 협의회의 주요 의제가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관리였다.


정부는 보건소의 50% 이상을 기지촌에 집중적으로 설치했다.
미군에게 '깨끗한 성'을 제공하는 것이 정부 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기지촌의 달러 수입은 국가 외화 획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비극적 입문 - 속임수와 인신매매

 

 

 

많은 사람들이 기지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영상에 등장한 박인순 할머니(81세)는 15세에 고아가 되어 먹고 살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았다가 기지촌에 팔려갔다고 해요. 짜장면 세 그릇을 사주며 접근한 여자가 그녀를 15,000원에 팔아넘긴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속아서 들어갔다고 합니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기지촌에 발을 들이게 되면, 소개비 명목으로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 많은 기지촌 여성들은 속임수나 인신매매로 기지촌에 들어왔다.


박인순 할머니는 15세에 짜장면 세 그릇을 사준 여자에게 15,000원에 팔려갔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는 거짓말로 많은 여성들이 속았다.
소개비 명목의 빚을 갚기 위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약물 중독과 빚의 굴레 -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

 

 

 


기지촌에 들어간 여성들이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약물 중독이었습니다. 포주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환각제를 강제로 먹였고, 이 약은 그녀들이 미군을 상대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를 주었지만, 동시에 중독과 빚의 굴레로 그녀들을 가두는 수단이 되었어요.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30알씩 환각제를 먹어야 했고, 이 약값은 모두 그녀들의 빚으로 쌓였다고 합니다. 약을 먹지 않으려 하면 포주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강제로 먹였고, 그렇게 약에 중독된 상태로 하루에 40-50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겁니다.

• 포주들은 여성들에게 하루 30알의 환각제를 강제로 먹였다.


약물은 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지만 동시에 중독을 일으켰다.
약값은 모두 여성들의 빚으로 쌓여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약물 중독 상태로 하루 40-50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다.

 


침묵을 깨고 나선 할머니들 - 피해자로서의 목소리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제 할머니들은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나선 이유는 자신들이 손가락질 받아야 할 가해자가 아니라, 사과받고 위로받아야 할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기지촌 여성들은 포주들의 폭행과 강요, 미군의 범죄, 그리고 국가의 방관 속에서 수많은 인권 침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것은 오직 성병 검진뿐이었고, 그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그녀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첫걸음을 내딛어야 하지 않을까요?

• 기지촌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알리기 위해 침묵을 깼다.


여성들은 포주의 폭행, 미군 범죄, 국가의 방관 속에서 인권 침해를 당했다.
정부는 여성들의 인권은 무시한 채 성병 검진만 철저히 시행했다.
이제라도 이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인 몽키하우스와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입니다. 국가가 미군을 위해 여성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했던 역사는 분명 부끄럽고 아픈 기억이지만, 이를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 영상을 보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점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생시켰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희생자들이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며 치유의 길을 모색했으면 합니다. 역사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어야 하니까요.